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시마 유키오 (문단 편집) === 도쿄제국대학 입학 이후 === 앞에서도 상술했지만 조부때부터 3대가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학부인 [[도쿄제국대학]] [[법학부]]에 [[고등문관시험]]에 합격한 엘리트 출신이었다. 우리로 치면 [[서울대학교/학부/법과대학|서울법대]]를 졸업하고 [[사법시험]]+[[행정고시]]에 합격한 셈이다.[* 과거 [[일본]]의 고등문관시험은 이 정도의 지위를 보장하는 시험이었다. 조선인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들은 해방 후에 행정부 관료, 판검사, 변호사가 될 수 있었고, 심지어 선택과목으로 법을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변호사 자격이 주어진 경우도 있었다.] 미시마 유키오 역시 조부와 부친처럼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걸로 유명해서[* 초등학교 때 같은 반에 별로 친하지 않던 친구가, 반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왔을때 "히라오카상(미시마 유키오)은 태어날 때 일도 기억해요!"라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걸로 전교에 유명했다고 한다. 한 일화로 미시마 유키오의 자서전격 소설로 유명한 가면의 고백에 주인공의 언급으로, 자신이 아기였을때 머리를 씻기려고 물을 담아놓은 대야에 머리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고 써 있다. 물론 자서전격 소설이 완전한 자서전은 아니니 진짜인지 알 수야 없지만.] 고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[* 이에 대한 증거가 미시마 유키오가 졸업식 연사를 했던 사진인데 당시 일본은 전교 1등이 졸업식 연사를 했기 때문에 이 사진이 미시마가 전교 1등이라는 증거가 된다. 또한 천황으로부터 금시계도 받았다고.]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. 참고로 아직 대학생일때 일본이 패망해서 제국 칭호를 쓰지 않게 되었기에 도쿄제국대학으로 입학해서 도쿄대학으로 졸업했다.[* 도쿄제국대학이 도쿄대학으로 개칭된게 1947년 9월이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대학 이름이 개칭되고 2개월이 지난 1947년 11월 28일에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개칭된 이름으로 졸업학력이 남게 되었다.] 그러나 그는 이후 [[문학]]에 더욱 심취하여, 아들이 관료가 되기를 원한 아버지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.[* 미시마의 아버지는 미시마 유키오의 방에 들어가 써놓은 원고를 찢어버릴 정도로 아들이 문학의 길을 걷는 걸 탐탁치 않아했다. 그런 상황 속에서 어머니인 시즈에가 미시마를 위로해 주면서 미시마가 계속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.] 그러나 미시마는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도 여러 잡지에 단편 소설을 출판하고 문학인들과 어울리며 문학도의 길을 착실히 걸어나간다. 그러나,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는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장관직에서 잘리고[* 후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나왔다.]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[* 당시 일본 내부경제는 전쟁자금 부족으로 2차대전 말기에 공무원 월급도 밀리거나 안 주고, 멀쩡한 회사 공장을 군부가 빼앗아서 군수물자 공장으로 바꾸는 등 엉망진창 개판이었고 종전 후에도 수습하느라 나라가 거지꼴이었다. 거기다 고위관료들도 공직에서 추방되고 재벌도 해체되며 군인들도 일본군이 자신들이 해체한 대한제국군 마냥 해체 되면서 전부 다 실업자가 되는 등(물론 나중에 자위대가 형성되며 그곳으로 흡수된 이들도 많다.) 일본의 엘리트 계층들이 죄다 나가리가 되는 상황이었다. 상류층도 이럴진데 서민들의 상황이 어땠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.] 집안 사정이 나빠졌다. 이에 따라 미시마 역시 취업을 준비하게 되어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47년 여름에 유명한 은행 두 곳의 시험을 봤으나 탈락했다.[* 필기시험은 다 합격했으나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한다. 이는 전후의 처참한 경제상황 속에서 도쿄대 법학부 출신이라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.] 결국 미시마는 아버지처럼 [[고등문관시험]]에 응시하여 졸업 직후인 겨울에 합격한 뒤 대장성[* 이미 문학활동을 병행하던 관계로 합격자 중에서 성적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. 합격자 167명 중 138등으로 합격했다. 물론 졸업 직후 바로 합격을 했다는 것, 게다가 계속 글을 써서 출판하는 것과 [[고등문관시험]] 공부를 병행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겸업을 하면서도 국가 고시에 합격한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거다.]에 입성해 관료가 된다.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공무원 생활 중에도 계속 글을 써 보내고 잡지사 등에서 출판하는 것을 병행했고 이런 겸업 체제가 길어지다 보니 원래 선천적으로 약했던 건강이 더 나빠지기까지 했다. 여기에 문인들이 고위공무원으로 잘 살 수 있는 자기 아들을 부추긴다는 생각에 성질이 난 아버지는 1948년에 그전부터 미시마의 글을 실어주었던 출판사(가마쿠라 문고)[* 유키오는 여기에 1945년부터 글을 기고하였다.]를 찾아가, 출판사 편집자에게 "아니 지금 당신들, 이제 24살(만23세) 된 어린 내 아들 기미타케(미시마 유키오)가 남들보다 글 조금 더 능숙하게 쓴다고 [[게이샤]]처럼 귀여워하는 거 아니오? 너무 부추기는 거 아니오? 뭐 걔가 나중에 시이나 린조(椎名麟三, ^^1911 ~ 1973^^)[* 일본의 소설가. 참고로 일본에서 몇 안 되는 기독교 신자였다. 한국에는 <내가 아는 그리스도>만이 유일하게 번역되어 있다.]라도 될 거 같소?"라고 항의했다.--실제로 그리 됐다.-- 이에 편집자 기무라 토쿠조(木村德三, ^^1911~2005^^)[* 패전 뒤인 1946년 1월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당시 가마쿠라 문고의 문예지 <인간>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았다. [[오다 사쿠노스케]]가 이 사람의 고등학교 후배다.]가 "[[아사히 신문]]에 소설 연재할 실력은 될 겁니다. 화려한 (스타) 작가가 되고 말고 하는 거야 운에 달린 거긴 합니다만, 최소한 일류작가가 될 역량은 충분합니다"[* '아사히 신문에 연재 소설은 쓸 수 있겠네'라는 말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었다. 당대 아사히 신문 정도의 메이저급 언론에 소설이 연재된다는 것은 당시 작가들이 선망하는 소설가로써의 최고의 영예이기도 했다. 그 [[나츠메 소세키]]가 아사히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면서 작가로써 이름을 떨쳤다. ]라고 하자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